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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글 나들이

최 정례 / 칼과 칸나꽃

by 알려하지마 2010. 9. 9.

 

 

 

 

 

                   Virginia Galvez  (Spain)

 

 

 

 

 

 

 

 

 

 

 

 

 

 

 

 

 

 

 

 

 

 

 

 

 

 

 

 

 

 

 

 

 

 

 

 

 

 

 

 

 

 

 

 

Untitled 

 

 

 

 

 

 

 

 

 

 

 

속았다 

맥주에 유통기한이 있는 줄 몰랐다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지난밤의 과음을 자책했을 뿐 

술 자체에 문제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잊지 말자, 맥주의 유통기한은 1년이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18~30개월이 된다 

그러나 그런 거 생각하다 보면 사랑 못한다 

잊자, 18개월이건 30개월이건 

그렇다면 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있는 것 같다. 슬퍼하는 와중에는 

그 슬픔이 천년만년 갈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슬픔의 유통기한이라는 거 

의외로 길지 않다 

슬픔의 안쪽에 있는 사람은 슬픔밖에 못 보지만 

슬픔의 바깥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시인의 눈에는 슬픔의 유통기한이 보인다 

 

 

 

 

 

 

 

 

 

최 정례 / 칼과 칸나꽃

 

Breeze II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가집의 국수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뛴다
국수발을 빤다


오래 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Breeze III 

 

 

 

 

 

 

 

 

 

 

 

 

너는 칼자루를 쥐고 있고 

나는 목을 들이밀고 있다 

이것이 이별의 순간이라면 너는 ‘연인’일 것이고 

사별의 순간이라면 너는 ‘신’일 것이다 

그 이별의 장소에서 나는 문득 칸나꽃을 본다 

나는 지고(敗) 있고 너는 지고(落) 있구나 

너도 ‘너 자신임’을 이기기 위해 싸우고 있구나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이 구절도 멋지지만 

시의 포인트는 그 다음에 있다 

시인은“슬퍼하자 실컷”이라고 말한다 

왜? 내일의 슬픔은 

오늘의 슬픔보다 옅을 것이고 

모레의 슬픔은 내일의 슬픔보다 옅을 테니까 

그렇다면 슬픔의 유통기한은 3일인가 

아무튼 이것은 

“슬픔의 넷째 날”을 알고 있는 자의 노래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Untitled 

 

 

 

 

 

 

 

 

 

 

 

 

 

 

 

 

 

 


           

 

Sofia Essaidi - Femme D'Aujourd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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