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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글 나들이

이 경임 / 부드러운 감옥 外, 3

by 알려하지마 2011. 3. 21.

 

 

 

 

 

 

Alina Maksimenko  (Ukraine, B.1974) 

 

 

 

 

 

 

 

 

 

 

서쪽 창가엔 빈 꽃병이 있었다

 

 

 

 

 

 

 

 

1

 

 

오래 전부터 서쪽 창가엔
빈 꽃병이 있었다
남자는
화원 속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그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꽃들을 돌보았으며
뿌리 없는 그의 꽃들을
자랑스럽게 내다 팔았다
그가 탕진한 하루만큼
그의 화원은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화원을
남자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늙은 우체부처럼
지친 해가 걸어들어왔다
해의 가방은
해가 떠돌아다닌 세상의 풍문들과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로 늘 무거웠다
해는 남자에게 편지들을 건네주었고
남자는 자신의 꽃들에게
몇 통의 햇살들을 읽어주었다
꽃들이 고요해졌다

 

The Chocolate 

 

 

 

 

 

2

 

 

남자는 해의 녹슨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해는 피로해 보였다
어디를 가나 그는
부양해야 할 꽃들이 너무 많았다
해는 언제나처럼 남자의 꽃들을
한 송이 한 송이 호명하고 있었다
꽃들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남자는
자신의 몸 속에서 향기가 새어나가는 것을 들었다
해가 마지막 꽃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남자의 몸 속에서 마침내 화원이 무너졌다
백발이 된 해는
숨을 헐떡거리며 서쪽 창문으로 걸어나갔다
오래 전부터 서쪽 창가엔
빈 꽃병이 있었다

 

 

 

 

 

 

 

 

 

 

 

 

 

 

 

 

 

 

 

 

 

 

 

부드러운 감옥

 

 

Sunny Temper,  2006 

 

 

 

 

 

 

아침, 너울거리는 햇살들을 끌어당겨 감옥을 짓는다.
아니 둥지라고 할까 아무래도 좋다 냄새도 뼈도 없는,
눈물도 창문도 매달려 있지 않은 부드러운 감옥을 나는 뜨개질한다
나는 높은 나무에 매달리는 정신의 모험이나 푸른 잎사귀를 찾아
먼 곳으로 몸이 허물도록 기어다니는 고행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잎새들의 춤이 바람이 불 때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잎새들은 우우 일어서며 하늘 속으로 팔을 뻗는다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의 모서리나 계곡의 풍경이
나를 밟고 걸어간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걸어나가고 싶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가로등 쪽으로 걸어간다 지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로등을 지나쳐 지하도 입구 속으로 사라진다
옆구리를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기어 나온다
거미의 그물을 뒤져본다 낡은 점자책이 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나의 뻣뻣한 손가락들이
닳아진 종이 위의 요철 무늬들을 더듬는다
몇 번을 솟아오르다 또 그만큼 곤두박질친 다음에야
희망이란 활자를 읽어낸다
문장들이 자꾸만 끊어진다
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 경임

Carmen,  2008 

 

 

 

 

The Fish, 2006 

 

 

 

 

 Stripy Socks',  2003 

 

 

 

 

Maleri 

 

 

 

 

 

 

 

 

담쟁이

 

 

 

 

 

 

 


내겐 허무의 벽으로만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만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하게 취하는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 내리지 않으려 하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 내리는 저 여자


오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 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누구도 뿌리 내리지 않으려 하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 내리는 저 여자


오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품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 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친네 벽 하나를
몸속에 삼키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 먹고 있네.


아, 지독한 사랑이네.

 

 

 

 

 

 

 

 

 

 

 

 

 

 

 

 

음악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론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

 

 

 

 

Music Lesson,  2007 

 

 

 

 

Bathing,  2008

 

 

 

 

Great Flower Girl,  2008 

 

 

 

 

Friends,  2004 

 

 

 

 

The Spring II,  2010 

 

 

 

 

The Red Room,  2010 

 

 

 

 

*

 

 

 

 

 

 

 

 

 

서쪽 창가를 바라보는 건   
이미 익숙해져 버린 기다림이다.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Sharron Kraus - Impa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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